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만 제국 (문단 편집) == 문화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ottomanculture.jpg|width=100%]]}}}|| || 오스만 제국 시기 이스탄불 거리의 모습 || 오스만 제국은 몇 백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전체, 그리고 이집트와 동지중해 연안 지방 등을 다스렸기에 문화적으로 다채로운 편이었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기본적으로 [[페르시아]]화된 [[셀주크 제국]]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전 몇 천년 동안 지중해 동부를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의 문화도 섞여 있었다. 이후 제국이 점차 확장되면서 유대인, 아랍인, 동방정교도, 아르메니아인 등 타 민족들을 흡수하고, 밀레트 제도를 통하여 이들의 문화 보존을 허락하면서 이들의 문화 역시 오스만 제국 내에 점차 녹아들어갔다. 다만 역시 오스만 문화의 주류는 크게 3가지로, 첫 번째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문화, 두 번째가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문화, 마지막이 이란 지방의 페르시아 문화가 오스만 문화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궁정에서는 옛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시를 잘 짓는 것을 지식인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때문에 고관대작들이 시를 짓는 것을 연습하거나 즐기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고전 페르시아의 시들이 사랑받으며 잊힌 페르시아어 단어들이 시를 통하여 다시 부활하였으며, '가젤'(gazel)이라고 하여 사랑과 이별에 다룬 페르시아풍의 시들도 유행했다. 한편 19세기부터는 점차 서구식 개혁인 [[탄지마트]]의 영향과 그 반작용으로 튀르키예 고유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민간 문학들의 급부상으로 인하여 주로 궁정이나 엘리트층에서나 즐기던 고전 시문학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양반들이나 사대부들이 애용했으나 근대화를 거치며 명맥이 거의 끊어져 버리고 만 [[시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와 비슷한 문학양식인 [[산문]]의 경우, '사즈'라고 하여 아랍의 고전적인 각운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기에 시에 비하여 큰 문학적 성취는 없는 편이었다. 오스만의 산문 문화는 18세기,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의 소설이라는 장르가 들어오면서부터야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 문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캘리그래피]]라고 하는 이슬람권 전통의 서예다. 캘리그라피는 종교의 영향으로 식물이나 동물 등을 함부로 그릴 수 없던 이슬람 문화권에서 구불구불한 아랍 문자들을 대신 예술에 활용한 서예이자 장식 기법이다. [[아바스 제국]]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틀이 잡혀 발전하기 시작한 캘리그래피 문화는 오스만 제국 초기에 '디와니'라고 하여 유려한 곡선으로 아랍어를 써서 이를 장식용으로 쓰는 등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며, 16세기와 17세기 초 동안에는 기존의 아랍식 캘리그라피에서 탈피하여 네스탈릭, 리카 같은 오스만 풍의 캘리그라피가 따로 만들어졌고 특히 [[쉴레이만 1세]]의 재위기에 그 정점을 찍었다. 제국의 술탄과 관리들도 자신의 서명을 이 캘리그라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기아 소피아]]에 걸려있는 것이 바로 이 쉴레이만 1세의 캘리그래피 서명이다. 공예적인 부분에서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까지도 유명한 튀르키예의 [[카펫]] 제작술이 있으며, 이 카펫들은 서양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갈 정도로 그 품질과 인기가 좋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 카펫에 넣어진 문양과 색의 화려함으로 주인집의 부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특히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은 이 카펫을 바닥의 깔개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나 천장에 장식용도로 걸어놓는 태피스트리처럼도 이용했다. 또한 [[모스크]]에 가장 빈번하게 기부되는 물품도 바로 이 카펫이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일부러 공물처럼 카펫을 세금으로 걷어들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스탄불에서 60km 정도 떨어진 헤레케 지방에서 짜낸 카펫을 최고급으로 쳐줬으며, 그 외에도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외뤽의 카펫과 우샥, 밀라스 지방에서 만들어진 카펫들도 그 질이 굉장히 좋아 고급품으로 유통되었다. 한편 세공술의 경우에는 특히 금과 은세공술이 굉장히 발달했다.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귀금속은 은이었으며, 황금은 귀족층이나 황실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 세공술은 오스만 제국이 옛 동로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분야들 중 하나로, 일부러 성화를 새겨넣거나 비잔틴 양식의 돋을새김을 넣는 등 비잔틴풍의 금속 세공품들은 오스만 역사 내내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대부분의 보석 세공사들은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이었으며, 시계에 관심이 많았던 오스만 제국에서 일부러 서구에서 시계 제작가들을 초빙해오면서 이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대중 공연 분야도 있었다. '메다흐'(Meddah, مداح)라고 하여 커피집 등에서 소규모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원맨쇼도 있었으며, 민화, 국제관계, 일화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논하면서 주로 그 속에 들어있는 교훈적인 내용 등을 전달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물론 길거리나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다들은 사교나 유흥을 위주로 한 것이라 음담패설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재미있어할만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혹은 [[오디세이아]] 등 심지어 그리스 서사시까지 읊어주기도 했다. 특히 이 멧다를 하는 사람들은 1인극 특성상 한 사람이 여러 인물의 역을 맡아야 했는데, 이때문에 지방별 사투리를 따로 연습하거나, 아예 목소리를 바꿔서내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또한 작은 우산이나 손수건, 모자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고,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당시의 만능 엔터네이너인 셈. 2008년에는 이 멧다가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카라괴즈'라는 이름의 그림자 인형극, '메디안'이라는 이름의 대형 연극도 사람들이 즐겨 관람하는 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